안녕하세요.
지난번 글에서 아이의 “학교 가기 싫어”라는 말에 대해 썼었죠. 사실 처음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참석한 학부모 총회에서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가습이 답답해지는 착잡함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왜 학교를 “모르겠지만 그냥 가기 싫다”고 했는지, 그 실마리를 찾은거 같았거든요.
1. “난장판”이 아닌 “발언권”의 차이
해외 교실이라고 하면 다들 자유롭다 못해 무질서할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몸의 질서는 한국보다 훨씬 엄격해요. 제자리를 지켜야 하고 타인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철저하죠. 저는 현지에서 여러 번 수업을 참관했고, 담임 선생님의 허가를 얻어 두 나라에서 모두 직접 수업을 진행해 본 적도 있습니다. 제가 마주한 아이들은 매우 질서 있고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교사를 존중했습니다. 결코 무질서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입의 자유’였습니다. 몸은 자리에 붙어 있어도,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손을 들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게 그곳에선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습니다.

2. ‘경청’이라는 이름의 침묵
반면 다시 돌아온 우리 교실에서 ‘경청’은 곧 ‘침묵’과 동의어처럼 느껴집니다. 수업 시간 내내 아이가 자기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시간은 단 몇 분도 채 되지 않더군요.
사실 이건 선생님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구조의 문제가 큽니다. 4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방대한 진도를 빼야 하는 선생님께, 아이의 질문은 수업의 활력소가 아니라 ‘계획된 진도를 방해하는 변수’가 되기 십상이겠죠. 질문이 나오면 진도를 나갈 수 없는 교실. 아이들에게 쉼없이 물어보며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입식 교육이 존재하는 그 빡빡함 속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나오기 힘든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 학교는 너희의 “첫 직장”이란다
학부모 총회에서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아이들에게 학교를 ‘직장’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이것이 너희의 첫 ‘사회생활’이라고 가르치신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이제 겨우 여덟 살, 아홉 살인 아이들에게 학교는 즐거운 탐구의 장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견디고 책임을 다해야 하는 공간’으로 정의되고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이란 말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직장과 비유하는건 무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른들도 매일 아침 출근하기 싫어 괴로워하는 그 ‘직장’의 무게와 느낌 아시죠? 아이가 왜 가기 싫으냐는 물음에 그저 “모르겠다”고 답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습니다. 그 막연한 압박감을 어린 마음으로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했던 것이죠.
마치며: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지는 아이들
시설은 좋아졌지만, 아이들의 ‘발언권’과 ‘행복권’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느낌입니다. 단순히 질서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도를 뽑아야 한다는 압박과 학교를 직장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아이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선생님, 그런데요!”라고 시작되는 소중한 호기심이 ‘부적절한 돌발 행동’으로 취급받는 교실.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인 태도로 임하게 되는 수업시간의 풍경이 슬프게도 여전히 존재하며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선 어쩔수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걸까요? 아무리 진도 나가야 할 분량이 많더라도 교사들이 노력할수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 다음 글 예고
아이가 느낀 지루함은 단순한 투정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캐나다, 노르웨이의 수업 방식은 우리와 무엇이 달랐을까요? 아이가 그토록 하교를 아쉬워하며 “더 놀고 싶다”고 숨바꼭질까지 했던 그곳 학교의 비밀. 다음 글에서는 [한국 vs 해외 교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본 진짜 수업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